본문 바로가기

Exhibition/Review

[Review] 불가능한 귀향展 2008 1017 ▶ 2008_1104

불가능한 歸鄕_nostomania

책임기획_최금수

2008_1017 2008_1104 / 월요일 휴관


이인철_신혼의 이씨_종이에 목판채색_61×48cm_1992

본 전시는 (가칭)김종휘미술문화재단 준비모임의 의뢰로 故김종휘 화백의 작품 『향리』연작으로부터 주제를 끌어내어 꾸린 두 번째 전시입니다. 첫 번째 전시는 『鄕里-Reminiscence』展(책임기획_오광수) 2008년 6월 20부터 719일까지 진행된 바 있습니다. 출품에 응락해 주신 작가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스페이스 향리


 

초대일시_2008_1017_금요일_06:00pm

김종휘_강홍구_김건희_김주호_노석미_박홍순_선무_여승열
오순환_이김천_이인철_임춘희_정찬일_최호철
전시진행_김정민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향리_Space HYANGLI
서울 종로구 가회동 60번지
Tel. +82.2.3673.0585
www.hyangli.com



적응 ● "셋만 낳아 잘 기르자"는 관공서 표어가 곳곳에 붙여지던 시기에 태어났고 채 말도 배우기 전에 이촌향도 해버린 나로서 고향을 생각한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다. 하기사 유년기에 전쟁을 경험하고 그나마 잘 살아보기 위해 한 평생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들 뒷바라지에 온힘을 쏟으셨던 우리네 부모님들의 고향도 그리 아름다울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식민지 시절과 민족분단의 끔찍함을 몸소 겪으신 조부모님 세대에게는 아마도 고향이란 기억하기조차 싫은 치욕의 공간일 수도 있다. ●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삶을 영위하면서 꼭 국가 및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만 살아왔던 것이 아니기에 때때로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고향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스개지만 그 혹독한 빙하기에도 인류는 종족을 보존한 것을 보면 인위적이건 자연적이건 때로는 초자연적인 환경이건 간에 인간의 적응능력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김주호_싸랑해요_채유 후 초벌 질구이_62×23×19cm_2007



최호철_와우산_종이에 혼합재료_59×84cm_1994



오순환_일출_종이에 아크릴채색_17×21cm_1999



가족아마도 내게 고향이 있다면 그것은 출생지가 아닌 성장지일 것이다. 그것도 이제 막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기 시작하는 서울 외곽의 버스종점 부근으로 기억된다. 행정구역이 수시로 바뀌며 주택 사이사이의 자투리땅에서는 각종 경작이 이뤄졌고 쇳내음 나는 펌프물과 석유곤로가 일상을 지켜주던 시기였다. 그 동네는 가난했지만 각 집마다 너른 마당과 작은 연못 그리고 마을 어귀와 길가에는 산보다도 더 높게 느껴졌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골목마다 강아지들과 아이들의 다툼이 있었고 귀퉁이에는 연탄가게와 쌀가게 국수가게 등이 위치해 있었다. 미천하지만 이것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고향 이미지의 대부분이다. ● 더불어 성장기 고향 구성원들에 대한 기억은 잦은 이사와 몇 번의 전학 그리고 졸업 후 재개발 등으로 이미 잊혀진지 오래되었다. 다만 아직 유효한 것은 이런 경험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오고 있는 가족이라는 존재이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진정한 의미의 고향은 지리적 장소가 아닌 가족이라는 피선택된 혈연조직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배우자를 만나면서 선택된 가족들이 불어난다. 그렇게 저렇게 얽히면서 가족이라는 조직은 힘을 키워 가는 것 같다. 그래서 고향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이 가족들의 얼굴이다.



박홍순_Paradise in Seoul #052-S Korea_디지털 프린트_35×70cm_2007



정찬일_묵念_단채널 영상_00:06:02_2006



강홍구_fugitive1_디지털 프린트_40×60cm_1996


 

 

핑계근원의 힘을 생각해 본다. 지금과 미래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유효한 과거에 대해서 말이다. 스필버그의 공상과학 영화 『A.I.』의 데이빗처럼 어느 순간 버림받아 평생 한번도 좋았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삶의 원천이 되었던 '인간이 되고 싶은 기계의 마음'이 있었다. 인간은 각기 삶의 태도가 다르기에 마음의 고향을 섣불리 건드리기에는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더구나 가족으로부터 나오는 힘에 대해서는 이주노동자들의 다문화 가족도 있고 결손가족, 동성애 가족도 늘고 있는 상황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좋은 기억들만 읽어내자면 앞으로도 인류에게 가족은 계속 막강한 힘으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삶은 꼭 좋은 일들로만 구성되진 않는다. 그래서 아픔과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 그러나 바쁜 일상을 탓하며 그 고향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낯설은 타향에서 문득 남루한 고향을 마주칠 때. 반가움보다는 피하고 싶은 맘이 앞선다. 고향은 옴짝달싹 못하는 불변의 낡은 것이고 타향은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새로움이라는 얇삭한 셈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지만 또다시 바쁘다는 핑계로 고향을 멀리해 본다.




임춘희_우울한 들판_종이에 수채_18.3×27cm_2006



노석미_피곤하기도하고 상처받기도 싫다_종이에 아크릴채색_25×19cm_2005



이김천_날다_장지에 혼합재료_35×43cm_2008

 

허락된 고향맹목적으로 경제성장에만 몰두했던 우리에게 대가족의 해체는 그 구성원의 축소로 구성원끼리의 유대관계는 강화되었는지는 몰라도 대외적인 가족의 힘은 약화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국가 권력으로 힘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어쩌면 우리는 그나마 국가가 허락한 고향을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앞으로 고향은 출신국가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 자본화되면서 더욱 막강해진 권력의 욕심은 지역이 스스로 행복하게 살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지역에 위치한 고향마을은 의사 중앙이기를 강요받고 이미 회색 아파트촌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제 고향마을에는 아담한 뒷동산보다 높은 아파트가, 졸졸 흐르던 개천보다는 복개천 주차장이, 물레방아간 위치에는 러브호텔이 들어섰다. ● 아무리 남겨진 고향이 그렇다 치더라도 고향 하늘을 뒤로하고 떠나온 이들의 몸과 마음은 아직도 명절마다 고향으로 향한다. 아마도 이는 고향의 발전상을 목격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두고 온 가족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잠시나마 옹기종기 모일 한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둥지가 삶의 목적이 되어 과거와 미래에 대한 보상과 위로를 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아직도 술주정으로 무기력해진 고향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여승열_여관방1/2_판넬에 혼합재료_72×51cm×2_1995



김건희_Spectrum of Conflict-더빨리,더많이,더좋게

_캔버스에 혼합재료_117×91cm/55×95cm_2008_부분



선무_세상에 부럼 없어라_캔버스에 유채_116.8×91.0cm_2007



nostomania
김종휘 화백의 작품제목 「鄕里」로부터 『불가능한 歸鄕_nostomania』展은 기획되었다. 노스토마니아(nostomania)는 단순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鄕愁 homesick)보다는 좀더 강도가 높은 질병을 이르는 말로 이미 스스로 고향을 갈 수 없다고 느꼈을 때는 불치병이 될 수도 있다. 갈 수 없는 이유야 각각이다. 때로는 민족분단으로 실향민(김종휘) 또는 탈북자(선무)가 될 수도 있으며, 뉴타운 등 지역개발이라는 명목에 밀려나 얼떨결에 고향을 잃어버린 경우(강홍구, 정찬일, 이김천, 최호철)일 수도 있다. 먹고살기 위해 떠나온 고향과 미래의 삶을 걱정하는 노동자(이인철)도 있고, 구호가 적힌 거리의 설치물이 보이는 중국식당에서 바라본 눈빛(김건희)에선 전투기가 철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나마 아직도 남아 있는 따스한 인심을 찾으려는 노력(김주호, 오순환)도 있지만 쓰라린 과거 때문에 외면해야 하는 상황(임춘희, 노석미)도 있다. 또 고향 근처 여관 구석에서 나뒹구는 젊음(여승열)이 있는가 하면 붐비는 도심에서 억지로 한적함을 찾으려 애쓰는 장면(박홍순)도 있다. ● 꼭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향수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예 그리워 할 고향 자체가 없는 사람들의 아픔도 있다. 잠시 떠나온 것이 아닌 결여 또는 상실의 두려움과 그리움이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 최금수

 


김종휘_寂村_캔버스에 유채_72.7×72.7cm_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