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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Review

[Review] 법주사 마애불 _ 이김천展 2009_0918 ▶ 2009_1001


2009년 9월 18일부터 법주사 미륵마애불을 그린 이김천 선생님의 개인전이 열립니다.





법주사 마애불 

이김천 / LEEGIMCHEON / 李金泉 / Painting

2009_0918 2009_1001

초대일시 2009_0918 금요일 오후6

관람시간 11:00am ~ 7:00pm / 월요일 휴관

 

가회동60 스페이스향리 GAHOEDONG60 SPACE HYANGLI

서울 종로구 가회동 60번지

Tel. +82.2.3673.0585

www.gahoedong60.com


이김천 선생님의 이번 전시는 <법주사 마애불展> 이다. 석조 조각으로 알려져 있는 법주사의 ‘마애여래의상’을 수묵담채로 담은 작업이지만 이것은 불화가 아니다.

2007년부터 음성의 이김천스튜디오에서 새 작업이 나올 때 마다 꾸준히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김천 선생님은 그간 풍경과 생활주변의 정다운 이야기들을 채색 혹은 수묵담채로 표현하며 동양화 작업을 해 왔지만 기존의 전통 구도에서 벗어난 풍경화라던가 수묵배경에 아크릴 채색을 시도하는 등 화법이나 구도, 재료에 크게 구애 받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해 오고 있다.

이번 법주사 마애불 작품은 돌 부조로 되어 있는 미륵불을 수묵담채로 담았다. 3년 전 불화展을 가졌던 그는 지난 5월 ‘소리풍경'展 전후로 보여준 음악을 연주하는 神將圖 작품에서 정통 불화의 내용을 빌어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선보였었다. 이번 전시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듯 보이지만 기법 면에 있어서나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면에 있어 불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불화를 그리고자 하지 않았으나 부처를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저 부처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면 그 많은 불상 중에 특별히 법주사 미륵마애불을 고른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김천 선생님은 자주 찾던 법주사의 마애불을 보며 마음이 평온해 지는 것을 느꼈고 그 과정을 되풀이 하며 그것이 가진 종교적 의미나 불상 조각으로서의 작품 자체 보다는 심혈을 기울여 불상을 제작했던 작자미상인 조각가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다.
일반적 사찰의 불상이 그러하듯, 미술사적 가치를 가진 불상들조차도 그 작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불상이 제작되는 절차를 살펴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에는 불상을 제작하는 작가보다 그것이 가지는 종교적 의미가 더 클 수 밖에 없었으며 심지어는 그것을 제작하도록 주문한 제작자(왕 또는 귀족들)에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법주사의 마애불은 미륵부처를 표현한 불상이다. 미륵불은 부처의 제자 중에 하나로 57억년 후에 환생하여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전설을 가진 부처이다. 즉 소수의 선택된 자들을 위하거나 종교적인 권위를 돋보이기 위한 부처가 아닌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부처이며 그러기에 비례에 맞지 않고 이국적인 풍모의 부처이지만 더욱 온화하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러한 부처를 만든 조각가는 어떠했을까. 보는 이의 상상에 의해서만 유추할 수 밖에 없지만 미루어 짐작컨데 저렇듯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음에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과 소탈함으로 이미 중도의 길에 들어선 자가 아니었을까.



이김천 선생님은 돌을 다듬는 망치와 정이 아닌 담백한 수묵담채로 한 붓 한 붓 정성껏 화면을 구성한 마애불로 전시장을 가득 채워 놓으며 그 조각가의 마음을 그렸다. 그래서 일까, 이번 작품은 의도성이 엿보이던 지난 작업들에서 한걸음 성큼 나아가 버린 느낌이다. 뜨거운 여름과 함께 했던 작업의 시간은 분명 인고의 시간이었겠으나, 그 결과물은 뜨겁다기 보다는 내리쬐는 볕을 받고 적당이 익어 잘 영근 과일처럼 있는 그대로 상큼하고 부드러우며 소박하다. 가을볕을 받으며 미소 짓고 있는 선선하고 소박하며 온화한 마애불을 보라. 작가의 모습과 그대로 닮아 있지 않은가.  김정민



 



편편한 법주사 경내 한켠에 산자락을 타고 내려앉은 커다란 바위 무리중 한 바위에 단아하면서도 명료하게 새겨진 부처님. 소박하게 지방화된 민불도 아닌 듯 한데 형태와 비례에서 묘한 쾌감이 있다.

인상적인 부처님상호와 잘록한 허리, 옷 주름과 두 손 표현의 섬세함, 연꽃위에 앉은 부처님, 도톰한 두발의 아름다운 표현 등..... 오래 볼수록 아름답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 바닥이 더 낮았는데 큰 비로 자꾸 토사가 자연스레 쌓여 지금의 높이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좀 낮은데서 올려다 보면 비례가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겠다. 그렇지만 난 지금 보이는 비례도 좋다.

세부적인 표현력과 전체적 안목을 볼 때 정확한 비례감의 표현능력이 부족하거나 사실적 표현능력이 부실하여 어색한 비례로 만들어낸 느낌이 아니라 사실감을 더 살리기 위한 수법처럼 느껴진다.

하체에 단축원근법으로 무릎 이하만 제대로 보이게 하고 허벅지부분은 정면에 투시되어 짧게 만들고 상체를 보는 이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쏠린 것은 새겨진 바위 정면이 왼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어 멀리서 정면을 볼 때 바로 보이게끔 제작된 느낌이다. 허리를 잘록하게 표현한 것도 아마도 연꽃에 아늑하게 앉아있는 느낌을 강조하기위해 무릎에서 허벅지까지 만들어진 투시의 연장으로 엉덩이가 뒤로 빠진 느낌을 만들며 생긴 자연스런 수법처럼 느껴진다. 경직된 원칙적 사실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지형과 눈높이, 각도등 여러가지 시각적 관계까지 깊이 고려하며 제작된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중에 아무래도 잘록한 허리는 법주사 마애불의 큰 매력이다. 그 매력에 끌려 마애불을 그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자유롭고 개방된 느낌을 조성하던 당시를 조금이라도 느껴보려는 생각이 컸다.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때는 이땅에 조선만 있었던 땅이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그려가며 느끼고 싶었다. 그리다 보니 그런저런 생각을 다 잊고 있었다.

어쨌든 옛 장인의 여러가지 시각적 배려로 보는 사람은 살아있는 부처님을 뵙는 듯 생생하다. 아마도 실제한다는 사실에 대한 생각이 우리보다 폭이 넓은 사람들 일 수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사람과 다른 삶과 생각이 있던 사람들이 간절한 무엇으로 새겨넣은 미륵마애불...

미술적인 시각으로만 이해되기 어려움이 많지만 수박 겉핱기 식으로라도 그려가며 느끼려 하고 있다. 종교적 숭배의 대상만이 아니라 그것을 조성하던 사람들의 간절함과 건강함이 오히려 깊은 예술적 감동을 주는 그 이야기는 미술이 특화된 예술로 자리잡은 지금 우리에게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그 옛분들의 조형감각의 다원성은 지금의 미감과는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옷주름에서는 마치 그리스조각을 보듯 유려하고 섬세하면서도 선부조의 단순한 평면성으로 표현되어있다. 분명 도상적이고 형식화된 부처의 조각인데.... 느껴지는 것은 전혀 경직되거나 근엄하지만 않고 친근하면서도 사실스럽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그 무엇을 지니고 있다.

제작한 분의 안목이나 당시 수준이 눈에 보이는 사실과 생각으로 느껴지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다. 아니면 그 둘을 떨어뜨려 생각한 적도 없는지도 모르겠다.

평면이면서 입체고 도상적인 선 맛에서 실제감이 함께하며 불균형의 안정감과 파격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시각적 재미와 종교적 숭배대상으로 완성도 높게 표현된 법주사마애불은 양극단을 두루 경험하며 중도의 미감을 체험한 대가의 손길이다. 그것은 아마도 한 장인의 손길 만으로도 어려운 시대적 지성의 산물일게다. 대원군이 당백전 때문에 철거해버린 법주사의 주불이었던 용화전의 청동 미륵삼존불이 사라진 지금 법주사가 미륵도량이라면 법주사 경내에 옛 용화전 자리의 커다란 금동미륵불보다는 경내 한쪽 귀퉁이의 마애불이 법주사의 주인공이지 않을까라고 혼자 생각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법주사 마애불을 소개한 자료들에는 비례도 이상하고 부자연스럽고 현실성이 부족하다며 수많은 마애불중에 그저 그런중에 하나로 써있다. 그렇지만 법주사에 머무르며 마애불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봤을때 여는 불교 숭배물과는 달리 사람들이 현실성있고 자연스럽게 부처를 친근하게 느끼듯 다가가며 즐겁게 만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조성된 마애불은 대부분 화강암의 특성상 망치로 정을 비껴 때려 돌을 뭉텅뭉텅 떼어낼수도 없이 정을 직각으로만 차곡차곡 두들기는 작업이란다. 그 내용을 알고 가까이 다가가 느껴보니 망치소리가 들리는 듯 무수한 정 자국이 어제 작업한 듯 생생하다. 그 작업의 노고 그 경지에 감사드린다. 또한 다른 곳도 아닌 법주사에 그렇게 조형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달리 어떻게 그려야겠다는 생각모르고 어릴 때 뎃생하듯 그렸다. 법주사 마애불에 표현된 기법을 보니 그리스, 인도, 중국의 온갖 기법이 화강암 바위에 총동원된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이 땅의 미감이 제대로 녹아 있는 법주사 마애불. 법주사 마애불을 통해 이곳 저곳 다니며 그리고 싶은 것을 볼 때마다 "그려야지.. 그려야지..." 했던 많은 것들을 그리게 될 계기가 된 듯 해서 더 의미가 있다. 차근차근 여기저기 그려가며 내안에 갇혀 있던 나를 조금씩 꺼내 사람도 그리고 세상도 그리고 싶다. 이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