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다
하인선
2016. 2. 19 - 25
가회동60 GAHOEDONG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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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선 _ 피어나다 196 x 147cm 한지에 연필 2012
하인선 _ 피어나다 196 x 147cm 한지에 연필 2011
‘연필수묵에서 자개목단까지’
하인선 작업에 붙여
1.
하인선의 지난 작업에서
겹쳐진 한지들 사이로 아련히 흔들리던 도자기와,
도자기를 깨고 나와 솟구쳐 나르던 나비떼를 기억합니다.
지금, 나비들은 희뿌연 허공을 떠나 검은 옻칠 창공 위를
무지개빛 날개로 비상 중입니다. 자개 나비들입니다!
작가는 어느날 갑자기 자개에 매혹되었다고 말합니다.
유년 시절, 안방의 아랫목에 앉아 까무룩이 졸고 있자면
석류열매 늘어진 영지밭 사이를 소요하는 노루와
흐르는 실구름 사이를 날던 학들과
산도화 핀 바위 아래서 파도를 희롱하는 거북과
현기증나는 환타지로 펼쳐지던 공작의 눈부신 날개 깃털…….
꿈결인듯 나를 감싸던 자개장 속 풍경들입니다.
개량화된 인테리어 환경 속에 살아가다 문득, 자개 소품이라도 만나게되면
익숙하고도 그리운 시간의 여울목으로 빠져듭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눈을 뗄 수 없는 홀림!
하인선 _ 피어나다 ∮40cm 원형자개 옻칠 2016
하인선 _ 피어나다2 ∮40cm 원형자개 옻칠 2016
2.
자개에 매혹되기는 순간이지만, 자개함 하나 만들어내기는 망망한 여정입니다.
작가는 지금 무릇, 나전 수행중입니다.
한지 작업으로 묘사되었던 목단과 나비들을 자개로 표현하기로 하였습니다.
백골(나무)에 옻 ‘생칠하기’로 시작되는 나전칠기 작업은
칠하고 갈아내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이십여 단계의 복잡하고 섬세한 공정을 고스란히 치뤄내야 했습니다.
수 개월에서 몇 해에 이르는 고된 작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우직하게 밀어붙여 끝을 보는 그의 기질 덕분일 것입니다.
실톱을 켜서 자개 한 조각 오려내는 일(줄음질)도 수행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마르게 갖다 대면, 쩍하고 금새 깨져버리고 말아
잘 어르며 제 성질을 공경할 때야 비로소, 온전한 꽃잎 한 장을 얻을 수 있었다지요.
자개목단의 현란한 아름다움을 단단히 붙들어주는 것은
그 아래 켜켜이 쌓인 빼곡하고 겸손한 노동일 것입니다.
바탕칠감인 옻의 수액도 영성깊은 액체같습니다.
옻나무에 깊지도 얕지도 않은 상처를 내서 흘러나오는 액을 겨우 받아낸다는데
내 상처에서 나온 진물이 다른 나무를 수천년간 보호하는 피막이 된다는 사실은
숙연한 시처럼 느껴집니다.
먹먹한 깊이로 고인 흑빛 옻칠 위로 자개목단 한송이 피어납니다.
하인선 _ 날아나다 73 x 125cm 한지에 연필 2011
하인선 _ 날아나다 53 x 90cm 자개옻칠 2016
3.
작가의 수많은 작업 과정 중에 특히, 부.비.다. 를 생각합니다.
알라딘의 마술 램프도 손으로 부벼주어야 마법의 전령을 불러낼 수 있고
아이의 아픈 배를 낫게 하는 것도 쓸어주는 약손입니다.
정한수 떠놓고 군에 간 아들의 안녕을 빌 때도 어머니는 두 손이 닳도록 합니다.
뿐이겠습니까. 꽃과 나비도, 암수 곤줄박이 새들도 힘껏 부벼대야 새 생명을 잉태하고,
인류 진화의 폭발점이 된 불의 발견도 부빔의 스파크로 가능했던 일입니다.
부빔은 마법입니다!
연필 수묵 작업도 부단한 부빔의 과정이었습니다.
마른 한지가 마른 흑연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것이 서로 베여서 번질 때까지
쉼없는 초대와 인내로 칠하고 부비며 흑연을 먹이는 과정이었습니다.
자개 작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칠하고 갈아내고 문지르고, 다시 칠하고 갈아내고 문질러 광내고….
지극한 문지름의 마법이 나비의 부드러운 날개짓을 만들어냅니다.
하인선 _ 날아나다 40 x 60cm 자개옻칠 2016
4.
최근들어 작가는 한지 위에 나전조각을 붙이는 자개 드로잉을 실험 중입니다.
엄숙한 전통을 익히고 삼키되, 자신만의 방식으로 곰삭혀서
무애한 드로잉의 결을 찾아 나서는 듯하여 기쁩니다.
근작에는 매화 가지와 목단 사이로 친숙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예의 연필 산수 속에서 보였던, 세상을 소풍하던 바로 그들입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 ‘접혀진 시간’, ‘주름진 공간’을 유영하는 이들...
반가운 마음으로 그들이 내민 손을 잡고 매화나무 위로 조심 발을 얹습니다.
노루도 거북도 봉황도 구름을 몰고 파도를 일렁이며
시간을 거슬러 멀리서들 하나 둘 모여듭니다.
함께 바라보는 휘엉청 달빛이 밝기도 밝습니다.
제미란(<길 위의 미술관>, <나는 치명적이다> 저자)
하인선 _ 소풍 47 x 28cm x 2ea 자개 한지 2016
피어나다
소망의 시간들을
그리고 지우고 문지르고
또 그리고 ...
주문을 건다.
피어라
피어라
무엇이든 꽃이 되어 피어라..
자개 . 나비 . 날다
정확히 언제인가는 알 수 없지만
마트에 갔다가 우연히 자개상을 보고
자개의 빛깔에 반해버렸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조개들의 몸을
이리저리 깎고 썰어서
제 속살들을 내밀게 한 것이
자개이다.
자개의 빛깔은
출렁거리는 파도와
노을 지는 하늘
반짝이는 물살들을 기억하고 있다.
하늘을 머금은 바다가 토해내는
색깔들이다.
내가 그리던 흔들리던 나비들에게도
빛깔을 주기로 한지 몇 년이 흘렀다.
매 과정이 마술이었다.
자르고 , 바르고, 칠하고, 갈아내고
문지르고, 비벼대고
끊임없는 손길을 주었다.
........
그리고 나는 나비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겁 없이 덤벼들어 작업을 했습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질문에도
귀찮을 법도 하신데
늘 자상하게 가르쳐 주신
중요무형문화재 제 10호 나전장 이형만 선생님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배려심 많은 이상훈 선생님, 씩씩하신 김봉윤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하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