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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Review

CROP_김광식展_ 2013_1227 ▶ 2014_0108

 

CROP by KIM KWANGSIK

 

김광식 展

 

2013. 12. 27 FRI - 2014. 1. 8 WED

 

Opening_2013. 12. 27 FRI  6pm

Closed on Sunday, 1 January

 

가회동60

GAHOEDONG60

www.gahoedong60.com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60번지

02-3673-0585

gahoedong60@gmail.com

 

 

 

 

 

 

 


Cropping-오종은_조경산수  watercolor pencil on paper_77x31cm_2013

 

 

 

 

 

그리고 싶다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면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보고 그것과 유사하게 그리려고 노력한다. 대상에 대한 관찰을 끝없이 반복하며 그리게 된다. 이들이 무슨 이유에서 이러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몰라도 무언가를 표현하고 재현하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러다가도 그려야 할 것이 소원해지면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닌 심상까지 표현하기에 이른다. 그 심상은 여러 형태의 모습으로 태어나 미술美術로서 지칭하게 된다. 그려지고 지워지고를 무수히 반복하는 '그리고 싶다’ 라는 충동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심미성은 그려서 마땅한 것을 찾기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표현의지의 탄생과 깨짐을 일상적으로 반복한 결과이며 사물의 본성을 찾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이다. 

문제는 이것들이 결과물로 완성되는 과정이다. 마치, 몸 안의 노폐물이 여러 기관을 거쳐 필요한 영양소만 흡수되고 출구를 통해 빠져 나오듯이 작업 과정 중에 입력된 여러가지 다른 불순물을 자신의 감각에 의지하여 걸러내기 시작한다. 이 과정이 원활하면 최소한의 통로로 걸러지게 되고 마지막 결과물의 순수성 또한 원래 생각하던 심상의 모습과 가까운 형태의 완결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걸러지는 과정에서 타자의 시선에 의해 잘라내기도 하고 더하기도 하는 순간, 원래 지칭된 사물의 본질에서 벗어나 기존의 재현방식까지도 시대에 맞게 끔 변모하여 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작자의 시각에서 타자의 시각으로 변환되는 시점을 갖게 되는 경험은 자신의 순수한 판단이 결여되기 쉽상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적 자족성에는 위배되나 타자화된 시선을 인정하며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할 때, 작자로서는 고정관념과 실체를 자각하는 경우가 많다. 타의성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작품의 한계성을 경험하는 좋은 수단이자 도구이다.

예술작품에는 타인의 경험이 정교하게 축적 되어진다.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다듬고 잘라내는 게 작가의 임무이기도 하다.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예술의 기능성에 수반되는 필요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광식 작가의 CROP 시리즈는 오종은 사진작가의 풍경 작품들에서 선택한 작품의 한 부분을 차용-확대하여 세밀하게 포토리얼리즘 기법으로 재현한다. 그런 다음, 원작인 사진을 같이 전시하여 드러내놓은 상태에서 김광식 자신의 작품으로 바꾸어 버렸다. 자신의 작품이 아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세밀하게 그리는 묘사 기법으로 사진 자체를 모사해 나아갔다. 미술 기법으로서 현상하고 인화하여 컴퓨터 그래픽을 거치지 않은 아날로그적인 포토샵을 수채 색연필과 손으로 실현하여 재현해 버린 것이다. 

 

 

 

 

 


Cropping-오종은_조경산수  watercolor pencil on paper_18x72.5cm_2013

 

 

 

 

 

미술 이론에서 보여지는 샘플링 아트라든가 차용미술(Appropriation Art)은 근간에 뿌리내려진 현대미술의 속성이기도 하거니와 이러한 부분이 예술이 되느냐 마느냐를 논하기에 앞서 이미 많은 경험치를 습득한 개념미술계의 속성이기도 하다. 유일성을 지닌 미술작품(Masterpiece)의 아우라 문제는 오리지널리티의 한계를 극복한지 오래되었다. 아니, 이러한 문제를 화두거리로 삼기에는 그것을 인정할 만한 근거도 오래 전에 논리적, 심미적으로 어느정도 마쳐진 상태이고 현재 진행형이라 정치적 시비거리도 못 된다. 이것은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서로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당화 된 부분이기도 하고, 타인의 관여가 저자의 몰락과 더불어 작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타인의 경험이 축적되는 것이 이제는 예술의 발전에 커다란 자양분이기도 하다. 타인으로서, 타자로서 관객의 입장에 서서 경험을 축적시키는 일은 정교해야만 만들어질 일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매한 교묘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전략적 방안이기도 하다. 맞춰지지 않는 이빨 빠진 퍼즐을 펼쳐놓고 맞추겠다고 우기는 것보다는 못 맞추는 퍼즐이니 못 맞춰질 것을 인정하고 이 빠진 상태로 내버려 두고 완성하는 것이다. 부재된 무엇인가는 오히려 존재를 증명한다. 이것이 아무도 모르게 되는 미완의 상태로 진행되면 ‘모든 것을 전부 갖추고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상태보다 훌륭해 질 수 있다.

예술성의 의미를 되새겨 볼만큼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적인 순간에 경험한 그 무엇을 보존하게끔 하고, 보존 방식의 차이가 여러 가지 모습에서 읽혀지기를 원하는 일반 대중의 요구와 취향성이 미술의 역사성을 고취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의 작품이 정교한 그림이 되던지, 아니면 사진처럼 보이는 미완성의 작품이 되던지 간에 미술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 보면 아름다울 ’미'자에 기술 ‘술’자를 쓰는 美術은 항시 인간의 감각 시스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미술이 사물의 모습을 객관화 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다면 미술가는 시각적으로 그것을 잘 도려내어 편집하는 기능을 갖춘 특혜 받은 자들이다. 
실재를 가지고 특허를 내는 일 - 이것이 바로 미술가의 일이며 임무인 것이다. 김광식 작가는 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미술이 화가와 사진가라는 전문가로서의 직업관으로 구분되어지기 보다는 여러 방면에 걸친 멀티플레이를 경험하여 무엇인가로 만들어내는 작자-저자로 읽혀지는 현 시점에서는 해야 할 일도 무궁무진하다.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장식하고, 비춰지는 조명에 온몸을 드러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과 타협을 거부하는 자로서 존재하던 기존의 예술가 보다는 적당한 타협점을 읽을 줄 알고 노동자로서의 예술가로도 자신을 대치시켜 봐야 한다. 정치적 예술의 형태가 그러하다. 기존 예술계의 헤게모니가 가지는 속성을 과감히 뿌리치고 부정할 근거도 만들어봐야 한다. 이것은 예술가에게 부과된 반골정신의 특권이기도 하다. 기존 헤게모니를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가장 긍정적인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긍정의 힘은 부정을 포함하고 열린 태도로서 이동하여 예술을 정치화 시키기도 한다. 

 

 

 

 

 


Crop-칼치 오마쥬_Watercolor pencil on paper_9.5x141cm_부분_2013

 

 

 

 

 

김광식 작가는 기존 예술계와 다른 축에 의존하여 홀로 서 있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사물의 본질이나 본성, 또는 현재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단순한 삶의 의지나 철학으로서만이 아닌, 자신의 의지가 투영되는 현대미술의 언저리를 보이려고 한다. 그의 의무일 수도 있겠다.
사실, 그리던 걸 전부 뒤집어 엎고 산으로 들어가도 아무도 모를 작가이고 그게 이상하지도 않을 작가이다. 허나 이 작가를 알려고 하면 깊어지며 반골의 늪에 빠지게 된다. 잣대를 들이대고 규칙을 적용시키는 작가적 비평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단순한 삶에 대한 짧은 고찰로서만 존재해도 어울리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 작가가 무엇을 그리고 표현하려던지 간에, 상대적인 것과 비상대적인 것 아니면 차갑거나 뜨겁거나 둘 중의 하나를 자신의 언중으로 드러내는 심플한 작가란 얘기이다. 그렇다고, 평 문맥의 행간으로 읽히며 자신의 의지를 져버리는 작자는 더더욱 아니지만 복잡성을 가질 만큼 어려운 작가도 아니다. 하여간에.. 무언가를 계속 드러낼 부분이 조금 이라도 있으면 심심치 않게 만들어낼 ‘작자'이다. 

그리고 싶은 그 무엇이 평생 지속되는 ‘화가畵家'들은 풍요롭진 않지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동시에, 표현된 지점을 드러낼 줄 아는 ‘작가作家'들도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재현시킬 의지를 지니며 재현하고자 욕망을 꿈꾸는 이들은 ‘작자作者’로서의 인생여정을 걷는다.
예술가들은 정신과 몸뚱아리를 통째로 담보 잡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심미적인 부분을 채워주기 위한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시대의 물음에 대답하고 부정하며,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업보를 극복해야 할 숙명도 지니고 있다. 

예술은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일상의 진정한 가치에 경의를 표하는 힘이 있다. 이러한 예술성의 본성을 실현시킬 의지가 분명한 자들, 그 '작자’들이, 작가 김광식이 풀고 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내고, 자르고 싶은 것을 잘라내고… 좋은 것을 좋다고도 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얘기해야 할 때가 더 많아질 것이다. 
 

 

- 가회동60 디렉터 손진우

 

 

 

 

 


Crop_103x77cm_paper_2013

 

 

 

 

 

 

 

 

 

답이 없거나 대안이 없더라도 
삶의 방식은 저마다 가지고 있고, 인생의 방향은 어디로든 흘러간다.

나이 사십 중반은
새로운 것은 없다는 걸 씁쓸하게 인정하게 되고
더이상 새로울 것 없는 일상사에서, 애처롭지만 은근히 적극적으로,
새롭다고 생각 되어지는 것을 발굴해간다.
진부한 형식의 틀을 바꾸는게 아니라 형식의 틀을 인정하면서,
요리조리 피해가며 눈치채지 못하게 이리 비틀고 저리 비뚤어지며
얄밉고 가볍게 살아 갈 수 있는 경험치를 스스로 체득하게 되는 것이며, 
흔히 얘기하는 '꼰대'의 틀을 서서히 갖춰가는 것이다.

꼰대가 되어 늦었다고도 할 수 없고 이르다고도 할 수 없는 
첫번째 개인전인데 오랜 게으름의 습관을, 입주변의 버짐처럼
어쩔 수 없는 천성으로 타고 난지라,
어렵게 튕겨져 나온 경제적 일탈을 십분 활용하지도 못하고 긴 시간을 허비한 뒤,
전시를 로션 삼아 얼굴에 덕지덕지 발라본다.
그래, 각질인지 버짐인지 구분 할 수 없는 두꺼워진 얼굴에서 뻔뻔함이 묻어나올때
나는 드디어 제대로 된 꼰대가 되는것이리라.

로션을 바를 때에만 사라지는 버짐처럼 이번 전시가 끝나면 다시 버짐이 피고 로션을 바를 날이 오겠지.
그땐 정말로 로션을 일찍 바르리라 다짐해본다. 아니다 로션을 안발라도 될 만큼 피부관리를 잘 하리라.

이번 전시는 누가 뭐래도 뻔뻔함이 오롯이 묻어 있는 꼰대의 얼굴에 피어난 버짐이다.

- 김광식 작가노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