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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Review

Into Space _ 이윤미展 2009_1230 ▶ 2010_0112


Into Space


Lee yoonmi

 

이윤미

 


2009.12.30
Wed - 2010.1.12 Tue


New years eve party 2009.12.30 pm 6:00




                Space Drawing, mixed media, 가변설치, 2009



정감적 큐비스트의 공간탐색 - 이윤미의 근작들


파노프스키는 1924년에 발표한 <상징형식으로서의 원근법>에서 서양회화의 원근법은 일종의 상징형식이라고 주장했다. 원근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다. 그것은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을 빌면 “고정된 한 점에서 투시하는 도법에 의해 2차원 공간에 깊이 있는 모양새를 부여하는 고안”이다. 그러니까 원근법은 특정 시대에만 유용한 일종의 규약이요 협정이다. 이 규약과 협정은 파기될 수 있다. 세계를 2차원 평면에 옮기는 다른 규약과 협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파노프스키는 눈을 하나의 고정된 시점視點이 아니라 그 둥근 모양새 그대로 구체球體로 간주하는 원근법을 가정한다. 둥근 망막에 맺힌 세계의 상은 구체를 평평하게 펼치는 순간 뚝뚝 끊어지게 될 것이다. 둥근 지구를 평평하게 펼친 지도가 뚝뚝 끊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파노프스키에 따르면 원근법이 고안된 르네상스 시대 이전의 중세회화 에는 이렇게 둥근 눈을 존중하는 회화적 공간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Space Drawing, mixed media, 가변설치, 2009

물론 다른 형태의 원근법도 가능할 것이다. 원근법의 전제가 되는 고정된 시점을 거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즉 소실점이 설정되어 있지 않거나, 시점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 소실점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회화를 상정해 볼 수 있다. 큐비즘 화가들이 제안한 회화적 공간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인데, 이윤미의 회화적 공간 역시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윤미의 회화적 공간은 큐비즘의 그것에 비해 좀 더 정서적이고 감각적이다. 그것을 나는 ‘정감적 큐비즘’ 이라 지칭하고 싶다. 이 정감적 큐비스트는 자신의 감정 선을 따라 공간을 구성한다. 즉 여기서는 먼저 특별한 감각들이 환기되고 이것들이 서로 연계되면서 회화적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까이 있는 것을 크게 그리고 멀리 있는 것을 작게 그린다는 원근법의 기본 규칙은 변형되거나 무시된다. 오히려 그와는 상관없이 내게 독특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들에 초점이 부여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주목하지 않은 것들에 특별한 무게가 부여될 수도 있다.


              Space Drawing, mixed media, 가변설치, 2009


이렇게 정감적 큐비스트가 산출한 공간은 우리에게 모순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모순을 품게 되면서 이윤미의 회화적 공간은 시적인 특성을 갖게 된다. 모순 없는 공간, 상식적인 구문들은 기호에게 정형화된 운동을 강요하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모순을 품은 이윤미의 회화적 공간은 여러 갈래의 운동, 어떤 다성적인 의미의 증폭을 빚어낸다. 이렇게 이윤미는 상호이질적인 것들을 조합하여 이야기를 꾸민다. 그 꾸며진 이야기는 화가의 내면을 투시하는 일종의 심리드라마가 된다. 이 드라마 속에서 내면의 이곳과 그곳, 저곳은 상호 얽혀 어떤 묘한 분위기를 창출한다. (이윤미의 회화적 공간이 연극이 상연되는 무대처럼 보인다는 점에 주목하기를!)

이와 더불어 기호는 통상의 지시성에서 일탈하여 부유하면서 다른 것들과 계속해서 결합하고 그 결합을 끊고, 다시 재결합한다. 이러한 기호의 운동을 이끄는 두 가지 축은 유사성의 축과 인접성의 축이다. 둥근 나무는 둥근 자기의 이미지를 끌어들이고, 다시 둥근 가슴의 이미지를 연결하며, 부숭부숭한 갈대들은 부숭부숭한 털들의 이미지를 끌어들인다. 그런가 하면 실내에서 바라보는 창문은 곧장 실외의 풍경과 연결된다. 이렇듯 정물화의 기표들과 풍경화의 기표들이 상호 얽혀 우리 눈앞에는 정물화이면서 풍경화인 것, 또는 정물화도 풍경화도 아닌 것이 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윤미의 회화적 공간은 다중결정의 장이다.

큐비즘 회화는 하나의 시점을 포기함으로써 그 하나의 시점이 전제하는 (환영적) 깊이를 버렸다. 달리 말해 큐비즘 공간에서 운동은 표면에서 심층으로 전개되는 방향보다는 표면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방향을 취한다. 여기서는 안쪽으로 향하는 시선보다 옆으로 향하는 시선이 우선권을 갖는다. 그래서 큐비즘 회화는 평면적으로 보인다. 하나의 고정된 시점을 포기하고 다중결정의 장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이윤미의 회화적 공간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다만 이윤미의 경우에 표면에서 전개되는 운동은 좀 더 신체적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드러누워 보면 위에 있는 것으로 되고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은 몸을 조금만 틀면 내 앞에 있는 것으로 된다. 또한 아무리 넓은 면도 어떤 위치에서 보면 가느다란 선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앞에 있다”,“내 옆에 있다”는 말보다는 “내 주변에 있다”,“내 가까이에 있다”는 말이 보다 정확한 묘사가 될 것이다. 이렇게 ‘주변에 있음’,‘가까이에 있음’을 가시화 하는 과정에서 이윤미의 큐비즘적 공간은 다시금 입체적으로 된다. 달리 말해 그것은 일종의 부조와 같은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각에서 파생된 부조라기보다는 회화가 공간적으로 연장되면서 발생한 회화적 공간이다.




              Space Drawing, mixed media, 가변설치, 2009



                Space Drawing, mixed media, 가변설치, 2009


                Space Drawing, mixed media, 가변설치, 2009


하지만 그렇게 튀어나온 것들이 화가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윤미에게서 운동과 유희는 ‘회화’라는 틀, 또는 영도(zero degree)를 전제로 하여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체를 다시금 평면으로 되돌리는 작업이 시작된다. 나는 근래 이윤미가 입체적 공간을 평면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전통적 장치인 ‘장식성’, 또는 표면의 반짝거림에 천착하는 것을 그런 맥락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큼지막하게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를 바라본다. 찻잔처럼 생기기도 하고 가슴처럼 생기기도 한 이 시커먼 그림자는 다른 주변의 것들과 뒤섞여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야릇한 감정이야말로 정감적 큐비스트의 지적인 실험을 추동하는 계기가 아닐까. ■ 홍지석(미술비평)




                Space Drawing, mixed media, 가변설치, 2009